어제도, 어느 날과 똑같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더라비린스에 접속했다.
평소와 같이 뭐 야무진 신작 올라온 게 없나 하며 기웃거리다 흥미가 떨어지면 그냥 롤이나 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던 와중 흥미로운 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중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참지 못하고 들어가 보니 특정 미궁 하나를 인증미궁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투표글이었다.
무슨 인증미궁으로 옮기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 해당 미궁을 살펴보았더니,
취향에 맞지 않는 그림체와 스토리, 문제가 조화를 맞혀 어우러지면서 불길한 위화감을 어마어마하게 내뿜고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들어가 보니 올해 초의 나도 같은 걸 느꼈던 모양인지 찍먹하고 유기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 즉시,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뒤로 가기 버튼과 함께 더라비린스를 나간 후 칼바람을 조지고 꿀잠을 잤다.
상쾌한? 아침루틴을 돌린 후 시간이 남아 라비린스에 접속했더니, 해당 미궁이 인증미궁에 등제되어 있었다.
찬성파와 반대파의 격렬한 다툼 끝에 결국 인증미궁에 등제되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게다가 이어서 올라온 중대발표와 수정사항에서도 무시무시한 내용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들에, 내 주식차트급 속도로 낙하하는 별점은 해당 미궁의 뿜뿜한 풍채를 알리는데 충분했다.
허나, 본인은 이미 당해본 놈이고, 당할 줄 아는 놈이다.
이미 여러 괴랄한 미궁들을 맛보았고, 어마어마한 시간을 흘려보냈던 내가 저런 문구들에 도망칠까 보냐
거기에 이런 도전욕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문구들, 더 이상 내가 도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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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지적유희이자, 서브컬처이자, 온라인 취미생활이며 누군가에게는 어트랙션, 혹자에겐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이것.
'미궁게임'으로 통칭되는 불투명한 장르에는 셀 수 없는 형질이 녹아있다. 그러나 그 근간은 또렷하다.
타 콘텐츠와 미궁게임은 '문제를 푸는 재미'라는 지점에서 확고히 차별화되며 유저들을 끌어모으고 마니아층을 빚는다.
이러한 점에서 해당 미궁은, 공포라는 감정을 이용해 재미라는 부분을 최대한 끌어내려 노력한 제작자의 노고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지지만,
그 과정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요소들을 다수 사용했고, 무엇보다 미궁게임의 정수이자 본질인 문제라는 요소를 등한시한게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매우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우선 연출적인 측면에서 공포를 테마로 설정한 것 자체에는 딱히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소음들과, 수인들의 등장이 꼭 필요했을까?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이동하기도 해야 하는 설정을 부여해 두고 지나갈 때마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기괴한 비명소리는 플레이어에게 공포보다는 짜증이라는 감정으로 전해진다. 고양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란 적게나마 귀여움이라는 요소가 포함되고, 이것이 변질된 모습에서 공포감을 느껴야 하는데, 첫 장면부터 이게 고양이인가 거울을 보는 건가 하는 감정을 선사하며 첫인상부터 미묘한 불쾌감을 주고 시작한다. 결국 공포라는 감정을 기대했지만 불쾌감이 느껴지는 미궁이 되어버린 것이다
뭐라고 할까... 시원한 느낌을 기대하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푹 떠먹었지만, 예상과 달리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 이라고나 할까?
이 외에도 단편적인 연출 부분에서 불쾌함과 짜증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제작자분께서도 따로 수정을 계획중이라고 밝히셨으며, 이러한 연출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무엇보다 언제까지나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미궁을 평가함에 있어서 문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대단한 스토리나 연출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문제만 존재한다면 미궁 게임이 될 수 있지만, 대단한 스토리와 연출이 있어도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미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미궁 내의 문제들은 매우 실망스럽다.
제일 처음 마주하는 문제 같은 경우, 문제 내에 주어진 힌트는 언제까지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문제를 풀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며 마치 별개의 문제 같은 느낌도 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문제가 너무 난해하고 그냥 툭 던져둔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특정 문제를 푸는 키워드가 A라면 A를 떠올릴 수 있는 정보를 문제 내에 넣어두는 것이 당연한데, 해당 미궁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를 힌트글을 통해 충당한다. 무슨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접근법이 맞아요? 하는 걸 하나하나 질문글로 물어봐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 투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몇몇 고수들은 빠르게 넘어가겠지. 이들은 이미 해당 트릭을 경험해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미궁 플레이어들은 그런 발상을 떠올리는데 굉장히 많은 경우의 수를 선회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심지어 해당 미궁같이 그 키워드가 전혀 듣도보도 못한 지엽적인 소재라면 일평생을 가둬두어도 풀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필자는 1번 문제를 푸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이 외에도 창의력이 느껴지지 않는 진부한 문제들도 많았으며 쌩노가다를 지시하는 문제들도 보였다.
제작자분께서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공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서 사람들이 받을 "감정"을 별점하락의 주 요인으로 손꼽으시는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필자는 해당 미궁의 별점이 낮아지는 이유에 문제 퀄리티가 5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해당 미궁을 재밌게 푼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도 특정 루트에서는 분명 재미를 느꼈구요.
즉, 해당 미궁의 가장 큰 장점은 특정 루트가 주는 게임성과 거기서 파생되는 재미들이겠죠.
스포가 될 수 있어 최대한 생략하여 말해보자면, 다양한 상호작용과 주인공이 장애물을 해처 나가는 과정, 특히 특정 페이지에서의 깜짝 등장은 정말 제작자에게 한방 먹었다 싶을 정도의 소름도 느꼈으니깐요.
만약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호불호가 갈릴만한 소재들을 제외시키며 문제를 가다듬는다면 굉장히 좋은 미궁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서 어떠한 연출을 하면 플레이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를 결정하는 연출가로서의 실력은 이미 상당하신 걸로 느껴지니깐요.
마지막으루 후기 남기실 때 채팅이나 자유게시판 등등에서 공개적으로 미궁 별점 등등 때문에 불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거 같은데, 저도 같은 감정을 느겼었지만 이건 걱정한다고 자의적으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아니잖아요. 결국 걱정하는 행위 자체가 딱히 의미가 없는 행위이니, 대신 본인의 작품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작품으로 느껴졌는지에 대한 평가 하나하나에 집중하시고 피드백을 걸러서 적당히 수용하시길 바랍니다. 해당 미궁이 당장 원하는 평가를 받지 못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내 마음을 좀 더 가다듬고 견고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나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저땐 저런 미궁도 냈었지 하며 웃음 지어줄 날이 오겠지요 !!